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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년 6월 제 5호
졸업생 기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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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언가를 찾기 위해 여기 저기 열심히 돌아다녀 봤지만 알고보니 그것은 저 먼 곳이 아닌 바로 내 곁, 아주 가까운 곳에 있었다는 이야기가 있던데요, 제게는 박사학위 과정이 바로 그런 시간이었던 것 같습니다.

입학할 당시 처음부터 저에게 거창한 꿈이 있었던 건 아니었습니다. 하고 싶었던 연구를 하고 좋은 논문을 발표하는 것. 그래서 언젠가는 힘들고 어려운 사람들에게 도움이 되는 사람이 되고 싶다는 것. 막연하게나마 이런 생각을 품고 학위 과정에 발을 내디뎠던 기억이 납니다. 특별히 저는 행동 신경과학(Behavioral neuroscience) 분야에 관심이 많았는데, 눈에 보이지 않는 ‘마음의 문제’를 눈에 보이는 scientific data로 풀어낼 수 있다는 것에 큰 매력을 느꼈기 때문입니다.

처음 접해보는 동물 실험, 자잘한 기본기를 놓칠세라 동물을 터치하는 법부터 연습해가며 관련된 논문을 찾아 읽고 세미나 발표를 하고. 드디어 본격적인 대학원 생활이 시작되었습니다. 모르는 것이 많을 수록, 부족하다는 생각이 들 수록 제 스스로를 다그치며 노력하려 했던 것 같습니다. 어느 순간 하루가 꽉 차더군요. 그리고 자연스럽게 제 생활은 lab을 중심으로 돌아가기 시작했습니다. 제가 원래 어떤 취미와 기호를 가진 사람이었는지 제 스스로도 잠시 잊어버릴 만큼 실험실 생활에 집중하고 적응하려 했으니까요.

남들이 저의 이런 모습을 보면서 ‘참 열정적이다’라고 이야기 했던 것이 기억이 납니다. 그리고 그때마다 으쓱하곤 했던 제 모습도 함께. 비록 다른 사람들처럼 똑똑하진 못하더라도 난 더 성실할 수 있고, 그렇게 살다 보면 언젠가 나도 어떤 수준에 올라와 있을 거라는 막연한 기대가 제 안에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한 가지 예상하지 못했던 문제가 있었습니다.
학위 기간은 결코 짧지 않은 시간이고, 그 시간 동안 혼자만의 열정으로는 이겨낼 수 없는 순간이 찾아 온다는 것을요.
특히 ‘자기 자신을 잃어 버린 열정’이란 옳지도 않고 오래 갈 수도 없다는 사실을 뒤늦게 알게 되었습니다.
갑자기 길을 잃어버린 거 같은 느낌.
많이 힘들었습니다.
열정은 내 장점이었는데 어느 순간 그것이 창피하게 느껴졌고, 제가 가졌던 열정의 크기만큼의 허무함이 저를 기다리고 있는 것을 보았을 때는 마냥 도망가고 싶은 마음 뿐이었습니다.

‘여기까지가 내 한계이구나’라는 생각이 들었을 때 한번 더 힘을 내 보는 것.
이것은 영화나 소설에서 봤던 것처럼 그렇게 쉬운게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럼에도, 그 한 발자국을 내디딜 수 있었던 것은 저에게 거창한 꿈이 있었기 때문도 아니었고, 제가 가진 남 다른 열정 때문은 더더욱 아니었습니다.

옆에 함께 있어주신 분들의 따뜻한 온기.
실험실에 훌륭한 학풍을 세워주시고 제 스스로를 잃지 않도록 큰 그림을 그려주셨던 김동구 교수님,
생각이 제자리를 맴돌 때마다 그 울타리를 훌쩍 뛰어넘을 수 있도록 앞에서 이끌어 주신 김철훈 교수님,
함께 실험하고 토의하며 지칠 때마다 서로에게 위로가 되어주었던 약리학교실 동료 선생님들,
무조건적인 신뢰를 받는다는 게 어떤 기분인지 알게 해주신 부모님.

‘꿈은 이루어진다’는 막연한 주문은 믿지 않지만 서로가 진심으로 잘되길 바라는 마음으로 내 주변 사람과 함께 마음을 합쳐갈 때, 작은 기적을 경험할 수도 있다는 사실은 부인할 수가 없더군요.
그리고 저는 이것이 길었던 학위 과정을 통해서 얻은 가장 값진 교훈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졸업 후, 저는 University of California, San Diego에서 박사 후 연구원 과정을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운전면허를 취득한지 얼마 되지않은 초보 운전자의 주행처럼, 아직은 많이 흔들흔들하고 덜컹덜컹합니다. 특히 새롭게 접해보는 brain circuit mechanism을 공부해보며 아직도 밝혀지지 않은 것이 너무 많고 이런 것들이 모두 흥미로운 연구 주제가 될 수 있다는 생각에 가슴이 떨립니다.
그리고 어쩌면 지금의 시간이 손에 파이펫을 잡고 연구에만 온전히 집중할 수 있는 마지막 기회가 될 수 있다는 생각에 더 열심을 내어보고 싶습니다. 물론 이제는 조금 더 절제되고, 정제된 열정을 가지고 말입니다.

가끔, 구름 한 점 없는 San Diego의 화창한 하늘을 고개들어 바라볼 때가 있습니다.
의아하게도, 그 때마다 마음속에 떠오르는 장면들은 학위과정 동안의 추억이었습니다.
그때 당시는 힘들었고, 지리멸렬했고, 그래서 그다지 추억할 것이 없는 시간인줄 알았는데, 의외였습니다.

실험을 시작하기 전, 설레는 마음으로 스티로폼 박스에 얼음을 담던 시간.
초조한 마음으로 현상기 위로 올라오는 western film을 노려보던 시간.
긴장되고 떨리는 마음으로 사람들 앞에서 랩미팅 발표를 했던 시간.
교수님과, 동료들과 함께 data discussion을 하다가 배가 고파오면 함께 짜장면을 먹으러 갔던 시간.

어느 시인의 표현처럼 “아무렇지도 않고 예쁠 것도 없는 사철 발 벗은” 그 일상 속에서 저는 이미 행복했고 그 순간들을 사랑했다는 것을 어렴풋하게 느낄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제 자신을 한없이 쏟아냈던 시간이었다고 생각했는데, 알고보니 거꾸로 제가 채움을 받았던 시간이었다는 것도.

중간에 포기했으면 참 많이 후회할 뻔 했습니다.
이렇게 소중한 시간이라는 선물을 평생에 두 번 다시 받아보기란 어려울 테니까요.

카피라이트